<[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신문마을 비석’, 비석들의 엇갈리는 운명> 학술활동 집필 언론 수상.선정

이번 주의 서울신문 컬럼입니다. 제가 썼던 원래 글을 함께 공유합니다.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신문마을 비석’, 비석들의 엇갈리는 운명>

며칠 전 서울 강북구 미아동을 답사했다. SNS 플랫폼 인스타그램에서 “미아동 탐사”라는 뜻의 “explore.in.mia” 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올린 “서울신문마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1965년에 서울 경기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이재민이 발생하자, 서울신문사에서 성금을 모아 이 지역에 집단주택을 건설했음을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정성이 뭉쳤다 뭉쳐진 힘으로 여기 새 마을 하나를 이룩했다 겨레의 사랑과 정성 위에 세워진 불사조의 마을이다”. 문자 그대로 새마을이다. 그리고 의연금을 모금해준 서울신문사의 이름을 따서 이 새마을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새마을 주변도 이제는 헌마을 취급을 받아, 미아3구역이니 미아11구역이니 하는 이름의 재개발이 비석 근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비석 남쪽 지역에는 1965년 당시에 지은 집단주택단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근처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이 비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신문 마을”이라고 불렀다. 누군가가 건축 자재를 갖다놓은 바람에 비석 뒤에 새겨진 <의연금품을 보낸 분들>의 명단은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랑받는 마을비석이라 하겠다.대서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마을을 조성하거나 노인정, 공부방, 놀이터를 짓는데 공헌한 동네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종종 만난다. 이런 비석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장군이나 권세있던 성리학자들을 기리는 비석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당당한 연구 대상으로 취급받지도 않기 때문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관련 자료를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대서울을 걸으면서 건물 옆이나 나무그늘 아래를 찬찬히 살피면, 이런 비석을 뜻밖에 자주 만나게 된다.서울 용산구의 용산2가동주민센터 옆에 세워진 <동장 이봉천 기적비>는,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해방촌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데 진력한 이봉천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렇게 동장을 기리는 비석을 목포에서도 하나 보았다(<전 동장 김영옥 송덕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방자치가 중단되기 전, 각 동네의 시민들이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삶을 정상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동장을 기리는 이런 비석들을 통해 느낄 수 있다.역시 전쟁 이후에 생긴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골목에는 <김점례 여사 배봉출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 일대에서 큰무당으로 활동하던 김점례 선생 부부가 전재산을 동네에 기증하고 노인정을 세워준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모르기는 몰라도 한반도 역사에서 이렇게 여성 무당을 기리는 비석은 거의 없지 싶다. 대서울의 귀중한 유산이다. 한편 부천시 소사본동의 소새울어울마당 앞에는, 이 위치에 어린이들의 공부방 자리를 기증한 동네 주민을 기리는 <심원 서경열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 시설은 지금도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마당이자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서경열 선생도 필시 기뻐하실 터다.이런 비석들과는 달리 그 존재가 잊혀진 비석이 서울 영등포구에 있다. 영등포역과 경인선 철길의 남북을 잇는 도림고가도로의 남쪽 그늘 한 구석에 서 있는 <차동식 선생 시혜비>라는 비석이다.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시절, 차동식 선생이 동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을 기념하고자 도림2동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이 놀이터가 조성되었음을 전하는 1981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도림고가차도 아래 어린이놀이터 설치>에는 영등포구청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되어 있고, 차동식이라는 이름은 지워져 있다. “영등포구 도림2동 도림고가도로 아래에 2백 7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가 만들어진다. 영등포구청은 지금까지 잡상인들이 무질서하게 자리잡고 있던 이곳 2백 70평에 8백여만원을 들여 벤치 그네 미끄름틀 등 놀이시설을 설치하기로 했다”. 정부・시청・구청 단위에서 하는 일이 대개 이렇다. 그들에게 하나의 마을, 한 명의 마을 사람은 기억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차동식 선생 시혜비> 주변에서 놀이터는 찾아볼 길 없고,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이 비석을 세웠던 주민 은 대부분 이곳을 떠났을 터이다. 이 지역에 세워진 고층아파트단지에 입주한 주민들에게 이 비석은, 마치 앵글로 색슨 정복자들이 아메리칸 인디언의 흔적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낯섬과 무관심의 대상이다. 자기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 도림2동 주민 차동식 선생의 행적은 당시에 정부와 언론사에 묵살되었고, 재개발 후에 이 지역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졌다. 부디 <서울신문마을> 비석은 이와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