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장서를 보존한다는 것 - 탐험가 마쓰우라 다케시로 (松浦武四郎) 의 경우  ・동아시아서지학書誌学ノ-ト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의 영유권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세기 중순. 이들 지역의 선주민들 중의 하나인 아이누의 영역을 탐험한 일본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탐험'이라는 말은, 마치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단어처럼 부조리합니다. 아이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선주민이 이들 지역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탐험가'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사람이 마쓰우라 다케시로 (松浦武四郎 : 1818-1888) 입니다. 그에 대한 일반사항은 마쓰우라 다케시로 기념관 (링크) 에서, 저서 목록은 이곳 (링크) 에서 볼 수 있고, 원문의 일부는 와세다대학 고전적데이터베이스 (링크) 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저서는 오랫동안 국문학연구자료관 사료관에 위탁보관되어 오다가 2005년에 위탁이 해제되었습니다 (링크).

  얼마전, 관련 논문을 쓰기 위해 <<마쓰우라 다케시로 선집 2>> (松浦武四郎選集2 : 北海道出版企画センター, 1997) 을 이용하다가, 해제에 적혀있는 글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마쓰우라 다케시로의 사후, 마쓰우라 집안이 그의 장서를 보존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래에 일부 옮깁니다 (2-3쪽).



... 일련의 <<에조일지>>를 비롯한 귀중한 문서가 전래된 경위에 대하여, 1995년에 봄에 타계한 마쓰우라 가즈오씨의 모친인 다미 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마쓰우라 다케시로의 유지에 따라, 마쓰우라 집안은 이들 문서를 '높은 곳에서 맡겨진 것' 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들 문서의 대부분은 막부에서 메이지정부에 인계된 문서들의 초고이기 때문에, 이들 문서는 높은 곳 (정부) 에 보관된 문서와 똑같다는 생각이다. 이 때문에, 간토대지진 때에는 제일 먼저 이들 문서를 리어카에 싣고 불길을 헤쳐 피난했기 때문에, 두 개의 창고에 들어있던 골동품과 가재는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우물에 던져 넣은 물건만 약간 남았다고 한다. 불타버린 재산 중에는 지금 물가로 2억 엔의 가치가 있는 다미 부인의 장신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윽고 2차대전이 시작되어 전황이 긴박해지자, 간토대지진 당시의 교훈을 살려, 이들 문서를 도치기현 사노시에 있는 다미 부인의 친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1945년에 접어들자 이 지역도 공습의 위협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수레에 싣고 언덕을 넘어 2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더욱 깊숙히 옮겨야했다. 도쿄에 있던 마쓰우라 집안의 집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며, 자산가 집안 출신이었던 다미 부인의 고가의 혼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쓰우라 집안은, 가재도구보다도 마쓰우라 다케시로 문서의 보존을 우선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쓰우라 집안은 도치기현 사노시에서 패전을 맞이하였지만, 문서를 책벌레로부터 지키기 위한 약재인 장뇌 (樟脳) 등의 입수가 어려웠기 때문에, 초등학생이었던 가즈오씨는 문서를 햇빛에 말려서 보존하는 작업이 매우 힘들었다고 기억한다. 이렇듯, 제1급의 근세 에조지 자료는 평온하게 마쓰우라 집안에 비장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주신다면 기쁘겠다...



  간토대지진으로 인하여,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본의 관계당국들이 한반도에서 도쿄로 가져간 한국의 전적들이 다수 소실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 중의 하나도, 한반도에서 유출되어 도쿄대에 소장되어 있다가, 우연히 한 연구가가 대출하여 자기 집에 가져다 두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고서의 복사본입니다. 한반도의 전적 뿐 아니라, 일본에 통합된 류큐왕국의 다수의 공문서도 도쿄대 등으로 옮겨졌다가 간토대지진 때 소실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복사본과 마찬가지로, 연구자들이 개인적으로 대출해 두었거나 등사본으로 만들어 둔 자료들이, 원본이 사라진 현재, 유일본이 된 경우가 다수 있습니다. 기록의 왕국이라 불린 조선왕조에 비하면 생산된 전적량이 소규모였던 류큐왕국의 역사를 연구할 때, 다수의 전적이 소실된 것은 큰 타격입니다.

  비단 일본에 약탈되었다가 간토대지진 때 소실된 전적들 뿐 아니라, 자고로 편하지 않은 역사의 궤적을 겪은 한반도 내에서도 숱한 전적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이규경 (李圭景 : 1788 - ?) 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에 실려있는 [우리나라 서적의 수난(受難)에 대한 변증설] 이라는 글이 흥미롭습니다 (링크). 

  문서란, 현존하는 것보다 소실된 것이 더 많습니다. 하나의 문서를 전래하기 위하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마쓰우라 다케시로 문서의 전래경위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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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9/11/05 23:53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헤르모드 2009/11/06 00:05 #

    옳으신 말씀입니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고전적이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기록의 전통이 끊어진 때문에 새로운 기록들이 축적되지 않고 있는 한국의 현상황은 위험합니다.

    게다가 일부 인사들은 현존 자료를 배척하는 동시에, 소실된 자료들에 환상을 가지고 위서를 만들어내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을, 현대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자학적 역사관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익명님의 새로운 포스팅도 잘 보았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서양서의 상황에 대해 늘 공부를 잘 하고 있습니다^^
  • 들꽃향기 2009/11/06 02:33 # 답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일전에 사학과 선배들과 얘기를 할때 일본이 비교적 자료가 잘 남은 것을 두고 '우리와 달리 외적의 침략을 안받아서 그래.'라는 식으로 '편하게' 얘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말씀하신 사례를 읽고 보니, 가산을 털어 전주사고의 실록을 지키려고 한 우리네 선비들만큼 일본에도 자료를 보관하고자 무던히 노력하는 개인의 노력이 있었군요.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는 말씀하신 이규경의 논지와 같이 그러한 '개인의 노력' 못지 않는 '수난'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기록의 보존을 위한 일본인들의 노력도 폄하되진 말아야 하나는 생각이 드네요..ㄷㄷ
  • 헤르모드 2009/11/06 02:40 #

    새벽에 오셨군요^^

    일본의 경우에는 확실히 외적은 없었지만, 내란은 많았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약탈과 여성에 대한 폭력, 그리고 방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겪으면서도 많은 책이 살아남은 것은,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사본을 만들었고 (중세까지), 열심히 출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근세).

    말씀대로, 세상에 자고로 공짜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를 !
  • 迪倫 2009/11/07 12:29 # 답글

    마쓰우라 다케시로 자체가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던데, 그 가족도 그에 못지않은 가족이었군요.
    에도시대의 상업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게되었는데, 잘 아시겠지만 규모는 크지않아도 마쓰마에번을 통해 에조를 경유해서 청나라 비단이 들어왔다고 하던군요.
    그리고, 막말에 막부 직속으로 속하게 해서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해서 영토를 확보하려는 의도의 홋카이도 "탐험"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그 탐험가들 중 가장 직위도 낮았고, 실제 개인적으로 에조지역을 돌아다니고 아이누인에 대해 인권주의자같이 막부비판도 많이 하고 해서 결국 바쿠후나 나중에 메이지정부로부터도 모두 이용만 당한 측면도 있고,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가 여러가지로 나뉜다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은 '높은 곳에서 맡겨진 것'이란 믿음으로 대대로 저렇게 열심히 문서를 보관했다니, 결국 남는 것은 정부나 정치가들의 계산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에 대한 소박한 믿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간혹 일본인들의 과도한 집착적 "경향"은 이해가 어렵다는...-_-;;) 잘 읽었습니다.
  • 헤르모드 2009/11/07 13:22 #

    말씀대로, '집착'에 가깝다고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런 집착이, 오늘날 일본에 방대한 고서, 고문서를 남긴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고서뿐 아니라, 한국으로 치면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목조 건물이 현존하기도 하고... 옛것의 보존에 대한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이 일본문화에서 발견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청나라 비단 (에조니시키 蝦夷錦 라고 합니다만) 에 대하여는 저도 약간의 흥미를 갖고 수집중입니다. 에도시대의 작품들을 보면, 나가사키 경유의 중국물건 외에, 마쓰마에 경유의 중국물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내용이 종종 발견됩니다. 이 놈들을 어떻게 해석해내면 흥미로운 논문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제 관심사이지요 ㅎㅎ

    잘 읽으셨다니, 저야말로 언제나 고맙습니다 (__)
  • 迪倫 2009/11/07 16:09 #

    경제가 성장하면 나타나는 희귀품/외래품에 대한 취미였을까요? 대부분의 에조지역 무역은 생선같은 코모디티인데 반해 이 에조니시키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사치품이어서 도대체 어떻게 에도시대에 받아들여졌는지 어느 정도 인기가 잇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역시 그런 사회상은 상업사나 경제사가 절대 말해주지않는 것이라서...헤르모드님의 멋진 해석과 논문을 (너무 오래기다리지않고^_^) 보게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저는 밤이 깊어져서 그럼 주말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헤르모드 2009/11/08 03:14 #

    일본 근세, 에도시대의 연극과 소설에는 '에조니시키'라는 단어가 작품 제목이나 내용에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저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 작품은 홋카이도 이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대로 이국취향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에조니시키를 등장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도시대 문인들의 작품 속에 중국식 원형 테이블이나 오란다 전래의 유리잔이 취향으로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지요.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현존하는 '에조니시키' 중 일부는 중국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진 직물에 '에조'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연구가 있더군요. 에조니시키의 중국 기원 對 일본 기원의 비율 및 명칭의 유래에 대한 연구가 관련분야에서 요즘 전개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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