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유용한 학술 사이트 정리 (2013 0515) 문헌학

제 한국어 블로그와 일본어 블로그에 각각 유용한 학술 사이트들을 정리해서 링크해두었으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아카이브즈, 서지학, 문헌학] 강연의 기본 틀 http://hermod.egloos.com/1934198

情報の泉(LINKS)

한편, 일본의 학술 사정을 아는데 도움이 되는 링크 두 곳을 소개합니다.

도호쿠대학 학생을 위한 정보탐색 기초지식 : 온라인으로 pdf 파일을 볼 수 있습니다.

와세다대학 제공 리서치 내비게이션

단상 2018 0220 - 일본인 이야기 단상

나고야의 주부국제공항에서 한 컷.

이제 <<일본인 이야기>>의 집필을 시작합니다.
집필하기 전, 일본 역사의 최신 상식을 재확인하기 위한 책을 몇 권 입수했습니다.

이번 일본 방문은 이 책의 첫머리를 어떻게 쓸지 착안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단상 2018 0220 - "근대 몽골" 이라는 화두 단상

장개석의 국민당은 왜 한반도와 몽골인민공화국의 독립에 찬성했는가? 왜 남몽골•위구르•티벳은 독립에 실패했는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제3세계의 모든 나라가 기뻐한 가운데, 이를 기뻐하지 못한 타이완과 조선의 고독•고립은 언제까지 이어졌는가(또는, 이어지는가)?

지난 몇 년 간, 이 두 가지 의문을 계속 지니고 있습니다.

* 아래 책 <<스탈린과 몽골 1931-1946>>의 표지 사진에서 스탈린이 입고 있는 것은 부랴트 몽골인의 옷입니다.



트레바리 제2회 모임 기념사진 학술활동 및 언론보도

트레바리 제2회 모임 기념사진.

그 날 제가 가져간 근대 고문헌을 각자 한 점씩 들고 찍었습니다



대한민국과 DPRK, 또는 신라와 발해 독서 기록

대한민국과 DPRK의 민족 동질성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성시 선생의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이라는 책을 떠올립니다. 이 책에서는 신라와 발해가 서로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인식하고 있던 사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 국경이 그어지고 나면, 애초에는 같은 말과 글을 쓰고 같은 제도 하에 있던 집단이라도 순식간에 서로 다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한 결합과 분리의 과정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숱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시리아/레바논, 남예멘/북예멘과 같은 사례도 현실로 존재합니다.

* * * * *

발해는 당, 일본과 장기적인 교류를 계속하는 한 편 남쪽에 인접한 신라와는 거의 외교 교섭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료상으로도 전 시기를 통하여 신라가 발해에 파견한 사절은 겨우 2회 확인될 뿐이다. 이것을 단순히 기록의 일실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러한 해석의 여지는 거의 없다. 그 근거의 하나로, 신라.발해 국경지대 가운데 동해 부근을 무대로 한 다음과 같은 전승(8세기 중엽)이 <<태평광기>> 권48에 남아 있다.

<신라국 (중략) 동[북]쪽은 장인(長人)과 접하고 있다. 장인은 키가 3장(丈)이고 톱니 같은 이빨과 갈고리 같은 손톱을 가졌으며 음식을 익혀 먹지 않는다. 금수를 쫓아 잡아 먹고 때로 사람도 먹는다. 몸은 벌거벗고 검은 털로 덮여 있다. 그(신라) 경계는 산이 이어져 수천[십] 리에 달한다. 중간에 산골짜기가 있는데 이를 단단히 지키려고 철문을 설치했다. 이를 철관(鐵關)이라 부르고 항상 노(弩, 요즘의 석궁처럼 방아쇠 장치가 달린 큰 활로 화살을 멀리 날릴 수 있는 무기 - 역주) 수천 개를 놓아 지키니 이를 통과할 수 없다.>

즉 신라 동북변에 인접하여 신장이 10미터 정도이고 몸 전체가 검은 털로 덮인 거인이 살고 있어서 신라는 쇠로 만든 관문을 설치하고 정예 부대를 배치해서 이를 지켰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할 수도 있는 이 설화는, 기본적으로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 신라.발해 국경 부근의 실제 상황과 동북쪽 국경 이북의 발해 영역민에 대한 신라인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이성시 1991a). 요컨대 국경을 접한 발해인은 신라인에게 형상이 다른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양국의 장기간에 걸친 몰교섭과 군사적 긴장이 이러한 설화가 빚어지는 데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신라가 발해 국경 부근에 강대한 군사시설(서북의 패강진전, 동북의 관문)을 둔 것 그리고 발해 영역민에 대해서 이형(異形)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결코 양국 사이에 빈번한 교섭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하나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발해가 쇠퇴하자 신라 국경 부근에 말갈 여러 부족이 출몰하여 교역을 요구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886년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삼국사기>> 권11 헌강왕 12년 봄 조의 기록이다.

<북진(北鎭)에서 아뢰기를 '적국인(狄國人)이 진(鎭)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습니다. 이를 입수하여 바칩니다'라고 했다. 그 나무에는 15자가 쓰여 있었는다.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인(黑水國人)이 함께 신라를 향해 화통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발해에 속한 두 개의 부족이 신라의 북진에서 직접 접촉은 피하고 대신 문자를 기록한 나무 조각을 가지고 통교를 신청한 사태를 보고한 것이다. 신라인이 발해 영역민과 일상적으로 교섭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형식의 신청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바로 그 이전 국경 부근의 교섭이 어떠했는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이성시 1991a).

이성시 지음, 김창석 옮김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 신라.발해와 정창원 보물>> 청년사, 1999, 163-165쪽

李成市「八世紀新羅・渤海関係の一視角ー『新唐書』新羅伝長人記事の再検討」『國學院雑誌』92-4, 1991a


한 권의 연구서와 한 권의 교양서 독서 기록

연구실로 한 권의 연구서와 한 권의 교양서가 도착했습니다.

배관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어떤 일본을 상상했나 - "고사기전"의 '황국'>>
高麗大学に在職中の裵寛紋先生の『宣長はどのような日本を想像したか-『古事記伝』の「皇国」』(笠間書院、2017)

오시마 아키히데 <<호소카와 가문 5대 일화집>>
戦友・大島明秀氏の『細川侯五代逸話集』(熊日新書、2018)

우선, 배관문 선생의 책은 "노리나가 문제"라 불리는 노리나가 학문 체계 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읽힙니다. 저의 첫 연구서와 마찬가지로 가사마쇼인에서 출판된 것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급한대로,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韓国=空国" 문제에 대한 부분을 먼저 읽었는데, 과연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韓)" 그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한국(韓国)"이라는 글자를 배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노리나가는 해당 문맥을 이해하는데 "한"을 연관시키지 않았거나 연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노리나가에게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전체 문맥이었다(こうしてみると、「韓」そのものの存在を否定し、「韓国」の字を排除した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分かる。ただ宣長は、当該文脈の理解に「韓」をかかわらせることはしなかった、もしくはできなかった。少なくとも宣長にとって、問題は「韓国」ではなく、全体の文脈にあったのである).>(89쪽). 상식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던 저의 노리나가 이해를 흔들었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전우 오시마 아키히데 선생의 책은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이 밀려난 뒤에 구마모토를 지배한 호소카와 가문의 일화집 <<수문록(随聞録)>>을 번각•번역•해설한 책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 이상으로 "진실"이었던, "일화"라고 하는 또 하나의 역사"(当時の人々にとって「史実」以上に「真実」であった「逸話」というもう一つの歴史)>라는 구절에 공감합니다.


정약용 <제강역고권단> 북동 유라시아의 전쟁과 문헌

쓸 글이 있어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살피다가,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제강역고권단>이라는 글에 대한 아래와 같은 해제를 읽게 되었습니다. 해제하신 분의 의견과는 달리, 저는 정약용이 <이 사료에서 고구려를 이은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운 것 같은데......

<정약용은 이 사료에서 고구려를 이은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는 『아방강역고』를 통해 우리의 강역이 왜 한반도 안에 고착되어 더 이상 밖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였나를 역사지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아방강역고>와 <비어고>에 대하여는 졸저 <<전쟁의 문헌학>>에서도 약간 다루었습니다만, 이 책이 중국 쪽 문헌만을 이용하고, 일본 쪽 문헌을 다루지 않은 점이 의아하게 여겨졌습니다. 정약용이 <<논어고금주>>를 이용한 전례가 있고, 유득공도 <<발해고>>를 편찬하면서 일본측 사료를 이용한 바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 * * *

<김부식(金富軾)은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고려(高麗) 의종(毅宗) 때임.】 위로 삼국(三國)의 시초와는 1200여 년의 기간인데【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에 혁거세(赫居世)가 개국(開國)하였다.】 조정(趙鼎)⋅장준(張浚)과 같은 사람이 위로 위상(魏相)⋅병길(丙吉)의 일을 기록할 때 어떻게 자세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우리나라의 고사(古史)는 황당하고 저속하여 하나도 그것을 근거로 할 수 없다. 삼한(三韓)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기타 사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일을 말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중국의 역사를 널리 참고하여, 우리나라에 관계된 모든 것은 빠짐없이 찾아내어 여기저기 것을 종합하고 분류하여, 연도를 고찰해서 차례로 편입시켜야만 비로소 종핵(宗核)의 실효를 거둘 것이다. 다만 동사(東史)만을 근거로 하여 구차하게 책을 만들려고 한다면 사실을 빠뜨리거나 연대를 그르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뜻을 둔 자로서는 마땅히 먼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강역고(疆域考)』는 잘 완비된 책은 아니다. 귀양살이 중에 서적이 전혀 없어서 찾아서 기입할 수 있는 자료는 십칠사(十七史) 중에서 『동이열전(東夷列傳)』 4~5권뿐이고, 그 제왕기(帝王紀)⋅표(表)⋅지(志)와 기타 열전(列傳)은 일체 보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빠지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 전부를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기(史記)』⋅『한서(漢書)』뿐이며, 『동이열전』을 참고할 수 있는 것은 또한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위서(魏書)』⋅『북사(北史)』⋅『수서(隋書)』⋅『신당서(新唐書)』뿐이니, 빠뜨리고 그릇되는 것은 면할 수 없는 형편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성경지(盛京志)』는 비록 전부를 보았으나 이 두 책에 기록된 우리나라 강역(彊域)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게 뒤엉켰으므로 간추려서 바로잡을 수도 없을 정도인데, 더구나 이를 믿고 근거로 삼을 수야 있겠는가.

『성경속지(盛京續志)』는 일찍이 지리책(地理策)을 주대(奏對)할 적에 잠깐 한 번 보았을 뿐 지금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한 번 조사하여 빠뜨린 것을 보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열수(洌水) 이북에서 압록강 이남은 한(漢) 무제(武帝) 이후로 늘 한나라 땅이었는데, 광무제(光武帝) 때부터 살수(薩水) 이북은 고구려에 소속시키고【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 이북임.】 이남은 한나라에 소속시켰는데, 그 후에 패수(浿水) 이북까지 모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지금의 대동강 이북임.】 그러나 패수 이남과 한수 이북은 끝내 한나라 관리 관할 하에 들어갔고 위(魏)⋅진(晉)을 지나 북위(北魏) 때까지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동사(東史)를 엮는 자는 패수 이남과 열수 이북의 지역에 대해서는 별도로 한리표(漢吏表)를 만들고, 아울러 그 사실을 기록하여 그 자취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동사에는 모두 이러한 사실이 빠졌으니, 이것은 불완전한 사례 가운데 큰 것이다.

열수는 지금 서울에 있는 강이다. 이 열수 이북은 본래 한나라 땅에 속하였고 이남은 삼한(三韓)으로서, 이 강물은 곧 삼한과 한나라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므로 삼한 사람들은 이 열수를 가리켜 ‘한강(漢江)’이라고 한다.

백두산의 원줄기는 몽고 땅에서부터 남으로 1000여 리를 달려와 백두산이 되었고, 그 큰 줄기의 동쪽 지역에 별도로 한 국면을 이루어 다른 지역과 섞이지 않은 곳이 있는데, 우(虞)⋅하(夏)⋅은(殷)⋅주(周) 때는 이를 ‘숙신(肅愼)’이라 하였고, 한나라 때는 ‘읍루(邑婁)’,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물길(勿吉)이라고도 하는데, 『위서(魏書)』에 보임.】 송나라 때는 ‘여진(女眞)’, 지금에 와서는 ‘오랄영고탑(烏喇寧古塔)’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미 한 선제 때부터 엄연히 말갈이란 이름이 나오니, 이는 매우 황당한 것이다. 비유하면 북적(北狄)인 경우 삼대(三代 ) 때는 ‘훈육(葷粥)’, 한나라 때는 ‘흉노(匈奴)’, 당나라 때는 ‘돌궐(突厥)’, 송나라 때는 ‘몽고’라고 하여 종류는 같지만 명칭은 동일하기가 어려운데, 한나라 역사를 엮으면서 돌궐이 침입하였다고 쓴다면 껄껄 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김부식 사기(史記)의 크게 잘못된 점으로서 덮어 둘 수 없는 일이다.

마한(馬韓)은 열수 이남의 땅으로 지금의 경기⋅호서⋅호남 지역이고,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좌도 지역이고, 변한(弁韓)은 지금의 경상우도 지역인데, 최치원(崔致遠) 이하 삼한의 강계를 논한 것은 한결같이 잘못된 점이 많다.>

『여유당전서』제1집 제14권 문집, 서, 제강역고권단


단상 2018 0206 - 옛 일본의 뎃생집 단상

에스콰이어 코리아 3월호 원고 완성. 

그림 뎃생집이라 할 "에테혼"을 다루었습니다.



20세기 전기 만주국과 북지(북중국) 지역에서 일본 세력이 제작한 비주얼 자료의 링크 문헌학

저의 소장 자료를 열람하러 오신 모 선생님께서 질문을 주셨기에, 20세기 전기 만주국과 북지(북중국) 지역에서 일본 세력이 제작한 비주얼 자료의 링크를 몇 개 정리합니다.

그리고 책도 한 권.

만주국 포스터 데이터베이스
満洲国ポスターデータベース

화북교통 아카이브
華北交通アーカイブ

해외신사(터)에 관한 데이터베이스
海外神社(跡地)に関するデータベース
神奈川大学非文字資料研究センター

시키 도시히코 <<만주국의 비주얼 미디어 - 포스터, 그림엽서, 우표>>
貴志俊彦 <<満洲国のビジュアル・メディア―ポスター・絵はがき・切手>> (吉川弘文館, 2010)


단상 2018 0130 - 초급 네덜란드어 끝 단상

초급 네덜란드어 끝. 
읽고 싶은 자료들이 조금씩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중급 네덜란드어. 

이번에는 교재를 신뢰할 수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갔습니다. 
초급 어학교재의 신뢰성이란, 철자가 틀리지 않고, 문장이 어색하거나 옛 표현이지 않은 것을 의미할 터입니다. 
한국어로 나와있는 네덜란드어 문법책을 봤을 때는 틀린 철자가 눈에 자주 띄어서 신뢰하기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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