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괴담집>>과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해제>>의 절판과 재출판에 대해 학술활동 집필 언론 수상.선정

귀국 후에 출간했던 <<일본 괴담집>>과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해제 - 근세편>>. 이 두 책의 출판권이 소멸되었었다는 사실을 지난 해 보고사/도서출판문 출판사에서 연락받았었는데, 오늘에서야 기억이 났습니다.

라프카디오 헌이 쓴 <<괴담 Kwaidan>>과 그가 이용한 에도시대 괴담 원본을 함께 수록한 이 책은, 나름대로 교양서로서의 가치가 있는 책이어서, 어떻게든 다시 출판이 되면 좋겠습니다.

2인 공저의 형식을 띤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해제>>는 제가 쓴 부분을 떼어내서 수정증보본을 출판하면 좋겠네요. 이 경우에는 십 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의 번역 주석본들과 함께 시리즈로 만들면 되겠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출판사를 알아볼 생각입니다만, 혹시 저의 SNS를 보고 계신 출판사 분들 가운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 발표] 임진왜란을 그린 조선시대 회화자료 북동 유라시아의 전쟁과 문헌

지난 6월 24일에 도쿄대 사료편찬소에서 <임진왜란을 그린 조선시대 회화자료>라는 보고를 했습니다.  딱히 논문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기 때문에, 정보 공유 차원에서 이곳에 공개합니다.  발표문은 일본어로 되어 있고, 고유명사는 한글을 병기했습니다.



발표문 본문

고전 한국학 연구에 유용한 일본 학술 사이트 소개 고전 한국학 연구에 유용한 일본 학술 사이트 소개 - 원문 이미지 제공 사이트를 중심으로 문헌학

고전 한국학 연구에 유용한 일본 학술 사이트 소개

- 원문 이미지 제공 사이트를 중심으로 -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51집, 2018·6]

김시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목차]

1. 총론
2. 인터넷에서 일본어 이용하기
3. 서지정보 검색 및 도구 사이트
4. 문헌의 원문 이미지 검색 및 열람이 가능한 주요 사이트
5. 마치며



컬럼 본문은 여기를 클릭

김시덕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 한국학을 위한 문헌이란 무엇인가? -> 2018. 10. 12 문헌학

다음 주에 모처에서 발표할 내용입니다. 

논문으로 만들 예정이 없으므로, 온라인에 공개합니다. 

별첨 자료는 생략합니다.


발표문 본문은 여기를 클릭

새마을운동이라는 도시화석 서울선언

전국 어디를 가든 새마을운동의 흔적에 맞닥뜨리다보니, "지금의 한국에서 새마을운동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됩니다. 

"조국 근대화의 초석"과 "박정희 독재의 이념"이라는 두 가지 주장 사이에서 서둘러 어느 한 쪽을 택하지 않고, 당분간 전국에서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을 계속하려 합니다.


<트레바리 7월 이벤트 - 서울의 탄생과 종교> 학술활동 집필 언론 수상.선정

7월 21일 일요일에 트레바리 강남아지트에서 <서울의 탄생과 종교>라는 주제로 강연합니다.  

예민한 주제여서 레주메는 배포하지 않을 예정입니다만서도, 제가 대서울을 답사하면서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아이템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에, 강연이 재미없지는 않을 터입니다.

사진은 영등포역 남쪽의 신길동 골목에 자리한 <대한 천리교 유성교회> 건물입니다.

<트레바리 7월 이벤트 - 서울의 탄생과 종교>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신문마을 비석’, 비석들의 엇갈리는 운명> 학술활동 집필 언론 수상.선정

이번 주의 서울신문 컬럼입니다. 제가 썼던 원래 글을 함께 공유합니다.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신문마을 비석’, 비석들의 엇갈리는 운명>

며칠 전 서울 강북구 미아동을 답사했다. SNS 플랫폼 인스타그램에서 “미아동 탐사”라는 뜻의 “explore.in.mia” 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올린 “서울신문마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1965년에 서울 경기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이재민이 발생하자, 서울신문사에서 성금을 모아 이 지역에 집단주택을 건설했음을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정성이 뭉쳤다 뭉쳐진 힘으로 여기 새 마을 하나를 이룩했다 겨레의 사랑과 정성 위에 세워진 불사조의 마을이다”. 문자 그대로 새마을이다. 그리고 의연금을 모금해준 서울신문사의 이름을 따서 이 새마을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새마을 주변도 이제는 헌마을 취급을 받아, 미아3구역이니 미아11구역이니 하는 이름의 재개발이 비석 근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비석 남쪽 지역에는 1965년 당시에 지은 집단주택단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근처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이 비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신문 마을”이라고 불렀다. 누군가가 건축 자재를 갖다놓은 바람에 비석 뒤에 새겨진 <의연금품을 보낸 분들>의 명단은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랑받는 마을비석이라 하겠다.대서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마을을 조성하거나 노인정, 공부방, 놀이터를 짓는데 공헌한 동네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종종 만난다. 이런 비석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장군이나 권세있던 성리학자들을 기리는 비석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당당한 연구 대상으로 취급받지도 않기 때문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관련 자료를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대서울을 걸으면서 건물 옆이나 나무그늘 아래를 찬찬히 살피면, 이런 비석을 뜻밖에 자주 만나게 된다.서울 용산구의 용산2가동주민센터 옆에 세워진 <동장 이봉천 기적비>는,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해방촌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데 진력한 이봉천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렇게 동장을 기리는 비석을 목포에서도 하나 보았다(<전 동장 김영옥 송덕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방자치가 중단되기 전, 각 동네의 시민들이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삶을 정상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동장을 기리는 이런 비석들을 통해 느낄 수 있다.역시 전쟁 이후에 생긴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골목에는 <김점례 여사 배봉출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 일대에서 큰무당으로 활동하던 김점례 선생 부부가 전재산을 동네에 기증하고 노인정을 세워준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모르기는 몰라도 한반도 역사에서 이렇게 여성 무당을 기리는 비석은 거의 없지 싶다. 대서울의 귀중한 유산이다. 한편 부천시 소사본동의 소새울어울마당 앞에는, 이 위치에 어린이들의 공부방 자리를 기증한 동네 주민을 기리는 <심원 서경열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 시설은 지금도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마당이자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서경열 선생도 필시 기뻐하실 터다.이런 비석들과는 달리 그 존재가 잊혀진 비석이 서울 영등포구에 있다. 영등포역과 경인선 철길의 남북을 잇는 도림고가도로의 남쪽 그늘 한 구석에 서 있는 <차동식 선생 시혜비>라는 비석이다.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시절, 차동식 선생이 동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을 기념하고자 도림2동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이 놀이터가 조성되었음을 전하는 1981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도림고가차도 아래 어린이놀이터 설치>에는 영등포구청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되어 있고, 차동식이라는 이름은 지워져 있다. “영등포구 도림2동 도림고가도로 아래에 2백 7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가 만들어진다. 영등포구청은 지금까지 잡상인들이 무질서하게 자리잡고 있던 이곳 2백 70평에 8백여만원을 들여 벤치 그네 미끄름틀 등 놀이시설을 설치하기로 했다”. 정부・시청・구청 단위에서 하는 일이 대개 이렇다. 그들에게 하나의 마을, 한 명의 마을 사람은 기억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차동식 선생 시혜비> 주변에서 놀이터는 찾아볼 길 없고,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이 비석을 세웠던 주민 은 대부분 이곳을 떠났을 터이다. 이 지역에 세워진 고층아파트단지에 입주한 주민들에게 이 비석은, 마치 앵글로 색슨 정복자들이 아메리칸 인디언의 흔적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낯섬과 무관심의 대상이다. 자기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 도림2동 주민 차동식 선생의 행적은 당시에 정부와 언론사에 묵살되었고, 재개발 후에 이 지역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졌다. 부디 <서울신문마을> 비석은 이와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기를 기원한다.


영등포 양평의 삼문화광장 서울선언

영등포 양평의 삼문화광장.

이곳에 조선시대는 없습니다. 있는 것은 지난 백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경성-서울의 시층들뿐.


김미지 <<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북동 유라시아의 전쟁과 문헌

  김미지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생각의 힘, 2019)을 증정받았습니다.  19-20세기 전환기의 한반도 주민들이 유럽을 경험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잘 엮은 책입니다.  

  17-20세기 동부 유라시아에서 한-러-일-중-미가 관계한 사실에 관심이 있는 저는 특히 제4장의 첫 절 <시베리아 철도로 닿을 수 있는 그곳, "세계일주가"가 노래한 유럽>이 흥미로웠습니다.  아래 인용한 부분은 실로 예리한 관찰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 일본 군부에서는 한반도-만몽-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대일본제국"의 일부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논의를 검토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일본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세계일주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고 실제 세계일주 기행서, 안내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 일찍이 1910년대에 최남선은 세계일주라는 아득한 꿈과 저 먼 나라들의 이야기를 창가의 형식으로 펼쳐내 보인 적이 있다.  1914년 10월 잡지 <<청춘>>의 창간호 부록으로 실린 "세계일주가"가 그것인데 ... 이 작품은 그에 앞서 나왔던 일본의 세계여행 안내서나 기행문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섬나라 일본에서 세계일주를 하는 여정은 거의 예외 없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또는 미국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최남선이 노래한 세계일주는 구아연락열차, 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부터 시작해서 유럽을 여행한 후 대서양을 건너가는 여정이다.  꼭 백여 년 전 최남선은 종횡으로 뻗어간 조선의 철도가 세계 대교통로가 되어 북방으로 유럽으로 통하게 되었으니 그 중심인 평양이 장래에 세계적인 대도회지가 될 것이라 장담한다. (171-172쪽)

  한편, 책의 머릿말에서 김미지 선생은 20세기 전기 한반도의 주민들이 나치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음을 튀빙겐대학의 특강에서 소개한 데 대해,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어떻게 답변했는지 소개합니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혜석이 저 문장을 쓴 1933년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고 제3제국이 성립한 뒤의 일이 아니냐고, 그런데도 독일을 여전히 문명국가로 칭송할 수가 있었느냐는 질문이었다. ...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1933년이면 이미 한국에도 히틀러의 소식쯤은 진작 들어와 있었고, 당시 한국의 신문, 잡지 기사들을 통해 독일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위기의식 역시 상당히 팽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11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대일본제국"의 일부로서의 한반도에 살던 주민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나치 독일과 히틀러를 경계했음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대일본제국" 내의 일반적인 분위기에 따라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적극적으로 칭송했음도 떠올렸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해방이 된 후에도 여전히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 현대 한국을 그러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문영 선생의 다음 컬럼이 참고가 됩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1981년에는 국회 공청회를 열게 했다. 국회 공청회에서 맹활약한 사람이 후일 <환단고기>의 번역서 <한단고기>를 출간한 임승국이다. 임승국은 1980년 5월 광주의 피가 마르기도 전 전두환을 향해 “가장 뛰어난 영단을 지닌 민족지도자”라고 칭송하며 국사광복을 가져와달라고 애걸한 사람이다. 그는 아예 대놓고 국수주의를 하자며 역사학자를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신독재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그는 ‘철학 있는 독재는 설득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회에서 히틀러를 인용하고 독일과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싸운 것을 칭송하는 듯한 발언까지 한다.

<환상적 민족주의에 젖은 ‘위대한 상고사’ - “우리 민족이 전세계를 선도했다” 책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의 계보와 주장>

  위서를 증거 삼아 한민족의 위대함을 주장하는 사이비역사학자들은, 말하자면 제국주의 일본의 마지막 잔존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후반의 한국에는 일본-만주의 모델(유신!)을 구현하려 한 지배 세력과, 이들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서 "위대한 한민족"을 내세운 근본적 민족주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이용하는 위서들이 20세기 전기 일본의 위서들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위서 비판에서 위서 연구로 ― 일본 위서의 검토 및 한국 위서와의 비교>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한반도 주민의 유럽 발견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일본/미국이라는 세 개의 프리즘을 동시에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학부에서 서양사를 공부했고 베이징대학에서 다년간 체류한 경험을 지니는 김미지 선생님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위치에 계시다고 이해됩니다.  유용함과 동시에 재미있는 책입니다.


佐々木孝浩 - 飯沼山圓福寺蔵 源氏物語「まほろし」帖 : 解題・影印・翻刻 독서 기록

11세기를 전후하여 성립한 현존 세계 최고 最古의 장편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 게이오대학 사도문고의 문고장인 사사키 다카히로 佐々木孝浩 선생은 <<겐지 모노가타리>>의 서지학적 특성에 대해 지난 백 년 간의 통설과 맞서는 이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지바 조시에 자리한 엔푸쿠지 円福寺 절에 소장된 <<겐지 모노가타리>> 일부 권을 상세히 검토함으로서 다시 한 번 기존 연구의 맹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 자체로 한 편의 전근대 일본 서지학 매뉴얼이라 할 정도로 철저하면서도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논문은 전체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ci.nii.ac.jp/naid/120006603185
飯沼山圓福寺蔵 源氏物語「まほろし」帖 : 解題・影印・翻刻

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당시까지는 아직 일본 학계에 전모가 공개되어 있지 않던 엔푸쿠지 절 소장본을 열람할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한국 불교와 관련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어보이는 불경이 한 점 있었는데, 불교를 연구하시는 몇몇 분들께 이 말씀을 드려도 별 반응이 없어서 그 뒤로 정보 공개 및 공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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